여자는 아침부터 칙칙하게 가라앉은 하늘 색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아 이불을 쓰고 누워 그저 습관처럼 텔레비전 채널만 돌려대고 있었다. 켜져 있는 텔레비전에서는 하얀 털 강아지가 뛰어다녔다가 병실에 시체처럼 누운 백발의 남자가 울었다가 입을 뻐끔거리는 물고기의 머리가 단박에 잘려나갔다가 한다. 사실 안개따위 핑계일 뿐이고, 침대 밖으로 발을 내놓지 않은지가 며칠째인지 모르겠다. 꽤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배가 고프지도, 허리가 뻐근하지도, 머리가 아프지도 않다. 다만 쏟아지는 졸음은 어쩔 수가 없는지, 검게 푹 꺼진 눈을 쉴새없이 깜박대는 것이 안쓰럽다. 리모콘을 든 오른손이 저리는지 몸을 한쪽으로 비트는 여자의 목덜미가 흐느적거리며 벗겨질 가죽처럼 고스란히 드러나보이고, 허옇게 들뜬 입술이 귀를 갖다대야 들릴 만큼의 실같은 숨을 내뱉는다.
덜커덩, 현관 쪽에서 익숙한 소음이 들려오고 여자는 돌연 호흡을 멈추고 귀를 기울인다. 비상한 집중력을 발휘할, 오로지 이 순간을 위해서 먹지도 자지도 않았는지 모르겠다. 딸까닥, 8센치 굽의 하이힐이 아무렇게나 벗겨지고 난방이 되지 않은 찬 마룻바닥을 밟은 이에게서 짜증섞인 신음이 흘러나왔다. 여자는 서서히 몸을 일으키며 여느 때처럼 눈앞이 까맣게 흐려지지 않는 스스로의 정신력이 대견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동시에 방문이 열리고, 빨간 원피스 차림의 또 다른 여자가 눈살을 찌푸린 채로 들어선다. 무릎 한참 위에서부터 드러난 검정 스타킹에 덮힌 다리는 하이힐이 없어도 아찔한 선을 만들어내고 있다. 침대를 두 손으로 짚은 여자는 텔레비전을 볼 때처럼 깜박이는 눈으로 검정 발부터 다리, 몸의 굴곡을 드러내는 빨간 원피스를 지나 훤히 드러난 밀크티 색의 가늘고 점이 많은 목을 훑어본다. 움찔,하고 순간적으로 몸을 가늘게 떤 원피스의 여자는 역시 발이 시린 것인지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는 옷가지 중 하나 위로 발을 옮긴다.
바람났니? 여자는 입모양을 만들어냈을 뿐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오랫동안 수분이 공급되지 못한 성대는 긁어내는 듯한 쇳소리를 낼 뿐이다. 원피스의 여자는 여전히 눈살을 찌푸린 채로 침대위의 여자를 주시한다. 너, 바람났구나. 이번에는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가 용케 밖으로 나와주었다. 그리고, 여자는 웃었다. 버석거리는 소리를 내며 잔뜩 말라있던 입술이 갈라지고 금새 핏방울이 맺힌다. 웃지마. 꼴이 이게 뭐야. 원피스와 같은 색의 촛농마냥 반들거리는 입술이 한숨을 숨기지도 않은 채로 아무렇게나 뱉어버린다. 헝클어진 긴 머리채가 바람맞은 갈대마냥 춤을 춰댔다. 침대를 짚은 두 손에 힘을 주고 일어서려는 여자의 시도는 보기좋게 실패했다. 손이든 발이든 제 생각대로 힘이 들어가 주지는 않는다. 제 꼴이 어린 시절 철썩같이 믿고있었던 달걀귀신 같지 않을까, 여자는 또 비실 웃고 말았다. 어차피 지금 소복마냥 추레할 이 목 늘어진 티셔츠도 언젠가 함께 샀던 것이었다.
밖은 역시 추운 것인지 원피스의 여자는 코끝이 빨갛게 얼어있다. 혹시 눈동자도 토끼처럼 빨간 게 아닐까. 그러고보니까 귀도 쫑긋하고. 나와 함께 살던 이 사람이 사실은 토끼였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코끝에 머물러 있는 여자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원피스는 역시 빨갛게 물든 긴 손가락으로 턱을 살짝 덮은 머리를 쓸어올리고 쉭, 소리를 내며 돌아섰다. 짐만 챙겨서 바로 나갈거야. 방을 나가는 원피스 자락이 방문을 스치고, 여자는 그 끝부터 서서히 붉게 물들어가는 네모 반듯한 문을 넋나간 듯 지켜본다. 집에서 기르던 토끼는 계절이 채 변하기 전에 잠든 것처럼 죽어버렸었다. 물은 주지 않고, 홍당무를 잔뜩 사다 주고, 추워하면 꼭 안고 자기도 했었는데. 아무런 이유도 없이 돌연 죽어버린 토끼를, 어린 여자는 이해도 용서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토끼의 눈이 빨갰던가. 아니 토끼가 토해놓은 피가 빨갰던가.
몸은 침대에 눌러붙은 것처럼 움직여지지 않는다. 여자는 금새 일어나기를 포기하고 다시 드러누워 이불을 쓰고 리모콘을 움켜쥔다. 밖에서는 원피스가 짐을 챙기는 소리가 분주하다. 트렁크를 열고, 그 트렁크는 아마도 여자가 모로코에서 사다준 광택나는 고구마색의 그것일게다. 먼저 옷가지들을 쌓겠지. 사실 원피스의 짐이라고 해봐야 옷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천 조각들 뿐이다. 어쩌면 여자와 함께 고른 석류냄새가 나는 바디클렌저라든지 씨디 몇 개도 가져갈 지 모른다고 생각해보다가 그만둔다. 그 모든 게, 이런 끝을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하니 또 비실 웃음이 스며난다. 몇 개의 핏방울이 투둑,하고 입술 곳곳에 얼굴을 내밀고 여자는 마른 혀를 낼름 내밀어 그 흔적을 감춘다. 빨간 원피스가 토해놓은 독한 향수 냄새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여자의 입 속으로 침투한다. 비릿한 피 맛과 기막히게 어우러진 향수 냄새는 역하지만 여자는 뱉어내지 않고 꿀꺽, 삼켜버렸다. 트렁크는 어렵지않게 닫히고, 찰박찰박 찬 바닥과 검은 두 발이 맞붙는 소리도 곧 사라졌다.